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세계 대전 (문단 편집) === 정체되는 전황 === 1915년 1월에 [[오스만 제국]]과 독일은 영국과 영국령 인도의 연결을 끊어버리기 위해 [[수에즈 운하]]를 공격하였으나 점령에 실패한다. 2월부터 독일은 영국의 해상봉쇄를 뚫고자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실행해 협상국의 상선 등을 무차별적으로 격침시킨다. 5월에 영국의 여객선 [[루시타니아 호]]가 격침되며 미국인 128명이 죽자 미국의 참전여론이 거세졌으나, 독일은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취하하기로 하여 미국도 이를 인정하고 화를 잠재운다. 하지만 이 작전은 꽤나 효율적으로 영국의 해상력을 경계하고 약화시켰기 때문에, 이후 말을 바꿔 또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감행하여 미국의 여론이 다시 악화되었으며 하술할 [[치머만 전보]] 사건으로 인해 미국이 참전한다. 영국은 꽉 막힌 서부전선의 교착을 풀어줄 돌파구를 찾을 겸, 독일에 고전하면서 오스만까지 상대하던 러시아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프랑스와 연합한 함대를 보내 2월에 [[오스만 제국]]의 영토인 [[다르다넬스 해전|다르다넬스 해협을 돌파]]하려고 했으나[* 해협을 통과할 경우 함대를 통해 이스탄불을 직접 포격할 수 있으며, 독일에 고전하던 러시아로 물자를 보낼 해로를 확보할 수 있고,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는 1914년 말까지 오스만 견제를 위해 동부전선에서 병력을 빼겠다고 영국에게 수차례 압력을 넣는 상황이었다.] 거센 저항 때문에 실패했고 4월부터 다시 지상군을 동원한 [[갈리폴리 상륙작전]]을 실행했지만 결과적으로 최악의 상륙작전이란 결과를 본 채 이듬해 1월에 물러날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일은 [[윈스턴 처칠]]의 가장 큰 [[흑역사]]가 되었다. 한편 4월의 협상국의 공세를 조용하게 지켜보던 [[이탈리아 왕국]]은 결국 [[삼국 동맹]]을 공식적으로 배신하여 [[런던 밀약|협상국에 가담]]한 뒤 바로 5월에 전 동맹국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1882년에 이탈리아 왕국은 삼국 동맹에 참여한 상태였으나 이미 1902년에 프랑스와 밀약을 맺어 삼국 협상에 발을 걸친 상태였다. 이후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삼국 동맹은 상호방위조약"이라는 이유로 참전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전쟁에서 이기면 프랑스령 [[튀니지]]를 이탈리아에게 줄 테니 이탈리아는 중립만 표방해도 좋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협상국이 이탈리아가 탐내던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영토를 미끼로 꼬시자 이탈리아가 넘어온 것.] 전쟁이 시작되면 빠르게 오스트리아-헝가리 영내로 진격할 수 있을거라는 이탈리아의 예상과 달리 국경을 넘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방어선에 가로막혔고 이후 두 나라는 험준한 [[알프스 산맥]]을 배경으로 힘겨운 대치를 이어간다. [[동부전선]]에서는 5월부터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갈리치아 방면에서 [[고를리체-타르노프 공세]]를 펼쳐 그 해 6월 렘베르크[* 오늘날의 리비우]를 탈환하였으며 곧이어 러시아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개시, 러시아는 폴란드에서 전략적 후퇴를 결정하고 8월에 독일군이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러시아 제국령 폴란드]]의 중심 도시인 [[바르샤바]]를 점령한 데 이어 [[브레스트(벨라루스)|브레스트-리토프스크]], [[카우나스|코브노]], [[빌뉴스|빌나]], 핀스크 등 러시아 서부의 주요 도시들을 차례로 점령할 정도로 독일이 우위를 점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독일이 러시아 제국의 수도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하기에는 여전히 러시아의 병력은 많았으며, 거리도 너무 멀었고 애초에 동부는 독일의 양면 전쟁에서 우선 순위가 아니었다. 10월에는 [[불가리아 왕국]]이 [[동맹국]]으로 참전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가 고전하던 세르비아 방면의 전투는 물론 [[발칸 반도]] 지역의 정세가 동맹국에게 유리하게 넘어온다. ||[[파일:external/img9.uploadhouse.com/22421599b95924b26e4590eb7b4281943975550e.jpg|width=100%]]|| || 영어권에서 일명 '''Going over the top'''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진.[* 사실 이 사진뿐만 아니라 'Going over the top'은 영어권에선 아예 1차 대전에서 참호 밖으로 나와 공세를 하는 상황을 지칭하는 관용구 수준이 되었다. 유튜브 등지에서도 위 단어를 입력하면 전쟁 영화의 장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참호]]에서 올라와 기관총탄과 포탄이 빗발치는 무인지대로 돌진을 시작하려는 영국군을 찍었는데, [[솜 전투]]의 가장 유명한 사진일 것이다. 후반부 전쟁에 뛰어든 [[미군]]도 사진의 영국군과 마찬가지로 무인지대로 돌진을 시작하려는 [[미 육군]] 병사들을 촬영한 기록사진이 있다. [* 출처는 영어 위키백과.] || 1916년이 되자 [[서부전선]]의 전투는 격화되지만 상황은 점점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특히 [[베르됭 전투]]와 [[솜 전투]]에서만 200만 명이 살상되는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했지만 전황은 크게 변한 게 없었다. 다만 베르됭 전투 이후 독일은 전력이 약해져 서부전선에서 방어 입장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독일 해군은 5월에 영국의 해상봉쇄를 뚫기 위해 영국 해군과 [[유틀란트 해전]]을 벌여 상대적으로 유리한 전과를 올렸지만 애초에 체급이 달랐기 때문에 봉쇄를 돌파하진 못했다. 이후 독일은 [[드레드노트]] 함대전을 포기하고 잠수함만 바라보았다. 또한 이 시기에 포르투갈이 1차 대전에 협상국 측에 참전했다. 당초 포르투갈 정부는 중립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1916년 오랜 동맹이었던 영국이 포르투갈의 항구에서 독일 배들의 나포와 화물 압수 등을 요구하자 독일은 포르투갈에 전쟁을 선포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포르투갈은 중립을 포기하고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서부전선에서 포르투갈은 영국과의 협의 끝에 영국군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보병 5만 5천 명과 포병 1천 명이 참전했는데 그중 전사 8145명, 부상 1만 3751명, 실종 및 포로 1만 2318명이 발생했다. 포르투갈 국적 선박 80척이 독일 잠수함대에게 공격받아 침몰했다.[* 그래서 포르투갈은 전사자는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본국에서 기아와 질병으로 죽은 사람이 8만에 달했다. 포르투갈은 전쟁이 끝난 후 보상으로 [[독일령 동아프리카]] 일부를 얻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2월에서야 불가리아와 합동으로 [[세르비아 왕국(1882년~1918년)|세르비아 왕국]]과 [[몬테네그로 왕국]]을 힘겹게 점령했으나 세르비아 정부는 여전히 항복을 거부하고 잔존 병력과 함께 그리스로 후퇴했다. 그리고 영불연합군이 세르비아군을 도와 [[테살로니키]]에 상륙하면서 발칸 전선이 완전히 정리된 것도 아니게 되었다. 게다가 6월에는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와 독일 동맹군을 상대로 [[브루실로프 공세]]를 펼쳐 오스트리아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약체라는 것을 명확히 드러냈다. 하지만 러시아 역시 여전히 엄청난 병력 동원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에 비해 전력이 열세였으며 피해가 꾸준히 누적되고 있어 1916년 말까지 병사 500만이 사상당했고 경제적으로 피폐해져 국내의 불만이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경우에도 러시아와의 캅카스 전선에서는 러시아한테 패하며 쭉쭉 밀려나고 있었고 중동의 [[아랍]] 부족들이 오스만으로부터 독립을 원하고 있었던 것을 영국이 지원하여 6월에 [[아랍 반란]]을 일으켜 예상 외로 잘 버티고 있던 중동 전선에서도 수세에 몰린다.[* [[아라비아의 로렌스]] 영화의 배경으로 유명하다.] 8월 27일, 그동안 중립을 표방하며 어느 편에 설지 간만 보고 있던 루마니아가 브루실로프 공세의 성공을 보고 협상국으로 참전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선전포고한다. 초반에는 카르파티아 산맥에 대한 오스트리아군의 방비가 빈약했던 덕분에 승리할 수 있었으나, 양적인 병력 증강에서 비롯된 질적 부족과 동맹국의 본격적인 개입으로 루마니아군은 곧바로 자국 영토로 밀려나 수도 [[부쿠레슈티]]까지 함락되었으며 몰다비아만 남은 상태로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어렵사리 버티게 되었다. 전쟁 동안 [[서부전선]]의 [[참호전]]을 타개하기 위해 숱한 신병기와 전술이 개발되었다. 현재까지 사용되는 거의 모든 보병전술의 기초가 이 시기에 확립되었다. 전쟁이 시작되던 1914년에는 어느 국가의 병사도 [[철모]]를 쓰지 않았으나 점차 너나할 것 없이 채택하기 시작한다.[* 그 전까지의 헬멧은 그냥 천으로 만든 모자였거나 가죽제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금속제가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고위 장교나 기병대 등에서나 사용했었던 것. 독일의 유명한 [[피켈하우베]] 역시 1916년에 [[슈탈헬름]]으로 바뀌었다.] 독일은 1915년 4월부터 시작된 2차 이프르 전투에서 살상용 독가스를 사용해 효과를 봤고,[* 사실 독일은 동부전선의 볼리모프(Bolimov)전투에서 먼저 썼었으나 강추위로 인해 실패했다.] 6월에 [[화염방사기]]를 첫 배치했다. 영국은 [[전차]]를 발명해 [[Mk 시리즈|마크 1]]이 솜전투가 펼쳐지던 1916년 9월에 실전 투입되었다. 영국의 전차를 보고 프랑스에서는 [[생샤몽]] 을 개발했고 전쟁 후기에는 세계 최초의 경전차인 [[르노 FT]]를 만들었다. 전쟁 최후기에는 [[A7V|A7V 슈투름판처바겐]]과 [[그로스캄프바겐]]이라는 물건이 독일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신병기들로도 참호전의 양상을 궁극적으로 타개하지는 못했다. 독가스는 사용조건에 제한이 있는데다 화학전 방호장비가 보급되면서 효력이 감소했고, 전차는 가장 획기적인 발명이었으나 초기 전차는 성능이 부족한 데다 전차 운용에 대한 노하우가 없어서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는 바람에 참호전을 궁극적으로 타개하는 데는 실패했다. 실제로 제1차 세계 대전 동안의 전차는 거의 움직이는 엄폐물 정도였다. 전쟁 말기인 1918년에는 [[MP18]] 등의 [[기관단총]]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파일:attachment/b02209_3-small.jpg]] [[항공기]]의 군사적 활용의 발전도 두드러진다. 전쟁 초에는 단순히 정찰, 그리고 상대 국민에 대한 테러 목적으로 미미한 폭격이 있었으며, [[비행선]]을 이용한 폭격이 시도되기도 하지만, 공랭식 기관총과 동조식 발사장치를 개발하여 기관총 한두 정을 장착한 빠르고 민첩한 [[전투기]]가 상대의 기구, 비행선, 정찰기를 격추시켰다. 그리하여 폭격용 비행선은 빠르게 사라지고 보다 빠르고 크기 대비 폭장효율이 좋은 대형 [[폭격기]]가 등장하여 상대국의 도시를 노렸다. 이에 따라 자국 방공망 구축보다 효율적인 항공기 운용을 위해 1918년부터 영국 [[공군]]이 세계 최초로 결성되었고 다른 참전국들도 이를 따랐다. 대전 말 전략폭격의 이론을 영국의 트렌차트, 미국의 미첼, 이탈리아의 두헤가 서서히 틀을 잡았다.[* 특히 미첼의 이론에 동조한 헨리 아놀드를 대표로한 육군 항공대 장교들을 시작으로 헤이우드 한셀, 석기시대 매니아 커티스 르메이 등 훗날 제2차 세계대전때 전략폭격으로 맹활약한 폭격기 마피아를 이루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